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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STE

향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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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료 들어간 화장품을 자유롭게 못 쓰는 사람은 향수를 사 모을 정도로 즐기지는 못한다. 다만 때때로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상황이 생기기도 해서, 하나쯤 가지고 있으면 좋다. 그리고 꽤 재미도 있다. 브랜드별 특징적인 점들이 재밌고, 사람들 취향과 경험으로 같은 향에 호불호를 느끼는 포인트가 다 다르다는 사실이 재밌다. 브랜드 로고가 가진 아이덴티티와 패키징도 흥미롭게 본다.

 


바이레도

바이레도에 이끌림이 한 번도 없었다. 보틀이 아름다워 보이지는 않는데 분사할 때 손안에 들어오는 그립감은 좋다. 뚜껑을 열고 닫을 때 찰카닥 달라붙는 감각이 재밌다. 보틀 라벨 서체의 간결함은 맘에 드는데 로고 디자인은 왜 저럴까 싶다. 학생 때 서체 만드는 수업했던 생각난다. 또는 어릴 때 갖고 놀던 조각 맞추기 같다. 이끌림이 없었는데 바이레도 향수가 왜 있냐면 지인에게서 선물 받았다. 하고 많은 향수 중 집시 워터 왜 줬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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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redo 집시 워터 ㅣ illustrated by NUANCE


내게 집시는 자유롭고 낭만적인 단어가 아니다. 책과 영화로만 접한 집시의 이미지는 '범죄'와 '공포'였기 때문에 무서움이 좀 있는데 물론 집시 워터가 무서운 향은 아니다(오히려 그 반대). 이렇게 쓰고 있으니 무서운 향조의 향수가 어딘가에 존재할지 궁금해졌다. Scary Blurry 이런 이름을 가진 호러블한 무드의 향이 어딘가에 있는 거 아니야? 어딘가에 있을 리가 없다. 그런 향이 세상이 나왔다간, 지금도 정신병자가 많은데, 엽기적 범죄 저지르는 사이코패스들의 난장판이 될 것 같다. 조향사가 일하다가 말 안 되는 조합으로 피비린내를 만들었는데 그걸 동료들과 공유하고 낄낄 웃고 폐기했을 순 있을 것 같다. 이름만 그렇지 블러디 메리도 무서운 맛은 아니다. 낯설어서 우웩 할 수는 있는데 무서운 맛은 아니지. 토마토도 셀러리도 좋아해서 나는 그냥 괜찮았다. 집시 이야기를 하다가 저 멀리 가는 의식의 흐름.


집시 워터는 바닐라 아이스크림 같다. 아이스크림만 맛있게 먹을 줄 알지 바닐라 향 자체를 좋다고 생각해 본 적 없는데 집시 워터가 가진 바닐라는 탈지분유 넣은 저렴하고 텁텁한 단내는 아니다. 그렇다고 저 위에 있는 고급스럽고 어려운 이미지도 아니다. 특별하지 않지만 편안하다. 약간 느끼하고 좀 더운 바닐라 아이스크림이 사라지고 나면 맑고 부드러운 향이 은은하게 남아 있었다. 좋은 사람이 따뜻하고 다정한 눈으로 바라봐 주는 것 같기도 했다. 대체 이거 왜 이름이 집시 워터일까.

 

조 말론

조 말론은 제품들의 이름이 직관적이다. 만다린, 피오니, 페어, 진저 같은 단어들로 이루어져 있다. 그래서 이름을 보고 고른 몇 개의 리본 버튼으로 잔향을 확인한 후 시향지로 요청한 것은 베티버 앤 골든 바닐라였고 한 줄로 진열된 보틀들의 가장 마지막에 있었다. 집시 워터 이후로 바닐라가 궁금해진 이유도 있었다. 시향지의 톱 노트를 맡고 와, 세다, 했다. 그러고 나서 치마 포켓에 넣어 두고 잊어버렸다. 다음 날 옷장 앞에서 사부작거리고 있었는데 낯선 향이 어디선가 올라와 스쳤다. 이게 뭐지? 내 방에서 왜 이런 향이 나지? 밖에서 창문으로 들어온 냄새라고 생각했는데 옷장 앞에 걸어 둔 치마에서 올라오는 잔향이었다. 아, 어제 그 조 말론이었어?라는 걸 깨닫고 치마 포켓의 시향지를 꺼내 코에 갖다 대는데 그게 너무 좋았다. 집시 워터의 바닐라가 코지하고 캐주얼하다면 베티버 앤 골든 바닐라는 상대적으로 시크한 매력이 있었다. 위스키가 떠오르기도 했다. 낮은 조도의 방 원목 책상에서 위스키 마시면서 일하는 지성인. 아니, 현실은 와인 한 잔으로 기분 좋아져서 잠드는 사람. 무슨 영화가 생각났냐면 앤드류 스콧(나 이 사람 특유의 발음과 악센트가 왜 이렇게 좋지.) 보려고 봤던 영화, 나는 부정한다 Denial. 톰 윌킨슨이 술장에서 술이랑 샌드위치 꺼내 먹으면서 일한다. 와, 따라 하고 싶었다. 따라 한다고 되지도 않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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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 Marone 베티버 앤 골든 바닐라 ㅣ illustrated by NUANCE


조 말론의 보틀은 한눈에 띄는 특이점이 있지는 않은데, 잘 다듬어진 직육면체의 형태와 비율이 조화롭다고 느껴지는 포인트를 가지고 있고, '영국'의 '클래식'도 있다. 더하거나 덜어내야 할 곳이 없어 보이는 밸런스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기프트 패키징 퀄리티가 훌륭하다. 조 말론에서는 고객의 요청이 없어도 모든 제품의 선물 포장 서비스를 기본 제공하는데, 포장 여부가 크게 중요치 않은 내게 꽤 인상적이었다. 유리 보틀에 묻어 있을 지문 얼룩을 깨끗하게 닦은 후 상자에 넣어 블랙 리본으로 장식하는 것만으로 충분한데, 라임 바질 앤 만다린을 팡팡 뿌린 검정 색화지를 적당히 구겨 향수 상자가 든 쇼핑백에 동봉해서 쇼핑백 입구에 또 한 번 블랙 리본을 묶어 준다. 향수 한 병을 구입하는 것이 아니라, 향기를 한가득 받아 가는 기분이 들게 한다.
베티버 앤 바닐라를 샀던 매장에서 응대해주신 분은 "좋은 하루 보내세요."라는 인사까지 잊지 않으셨다. 나는 정말로 그날 좋은 기분으로 하루 종일을 보냈다. 딥티크의 라벨 일러스트보다는 조 말론의 기프트 패키징과 프로페셔널한 응대 쪽이 내게는 더 감동 포인트다. 시향과 결제와 포장까지 모든 과정에 성의를 다한다는 인상을 충분히 준다. 이런 경험이 있으면 아무래도 이 브랜드를, 이 매장을, 이 사람을 한 번이라도 더 찾게 된다.

 

 

 

 

딥티크

관심 브랜드가 아니었는데 어떻게 된 일이냐면 리미티드로 나왔던 도손의 청록색 보틀 때문이었다. Peacock blue, peacock green에 조건반사적으로 반응하는 나는 저 병을 갖고 싶다고 딥티크라는 매장에 처음 갔던 것. 도손의 향이 맘에 들지 않아서 결국 구입하지 못했다. 이때 나는 딥티크에 대해 알지 못했을 때였다. 도손이 베트남의 마을 이름이고 딥티크 창립자 중 한 명이 유년기를 보낸 곳이라는 스토리를 미리 알았더라면 굳이 가지고 싶다고 생각 안 했을 것이다. 내가 내 향수를 쓰면서 저 사람 유년기의 추억을 왜 공유해야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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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ptyque 도손 ㅣ illustrated by NUANCE


직원의 추천으로 오듀엘르를 테스트했다. 바닐라 아이스크림은 좋아하고 바닐라 라떼는 싫어하는데 오듀엘르는 바닐라 시럽을 아낌없이 넣은 바닐라 라떼였다. 집시 워터가 바닐라를 궁금하게 해 주었다면 오듀엘르는 느끼하고 달아서 소화가 안 되는 기분이었다.

꽃시장 냄새에 유혹당해 구입한 롬브르단로는 꽤 개성 있는 향을 가지고 있는데 찌린내의 역습으로 어느 날부터 손이 가지 않아서 그냥 백조 그림이 반짝이는 유리 오브제가 되었다.
딥티크의 스토리텔링 방식과 라벨 삽화에 매력을 느끼는 사람들이 많다. 나는 며칠 봤더니 그림이 좀 지겨워졌다. 그리고 '난 도손의 향이 맘에 쏙 들어, 하, 그런데, 라벨 일러스트는 별론데, 라벨은 롬브르단로가 더 내 스타일인데.' 예를 들면 이럴 수 있지 않을까? 이런 사람 과연 없을까?

 

 

 

 

톰 포드

톰 포드 향수에 강렬하게 매혹당했었다. 향보다는 보틀의 디자인에. 내 확고한 취향은 각진 셰입 쪽이어서 잘 입은 클래식 핏 슈트를 닮은 보틀에 시선을 빼앗겨 시향을 했더랬다. 백화점 화장품 매장들 사이를 지나가고 있던 어느 날. 그런데 강렬한 첫인상과 다르게 가까이 가서 보고 만진 보틀은 묵직하고 견고하기보다는 좀 헐그덕거리는 장난감 같았다. 그리고 여기 매장 직원들은 화장을 왜 이렇게 다 무섭게 하고 있는 걸까. 톰 포드 뷰티의 바이브가 녹터널 애니멀스랑 똑같네 그랬다. 드레스업 해야 할 것 같은 무게감과 화려함이 나와 안 맞는다고 생각했는데 향을 직접 맡으면 또 세련미 섹시미 퇴폐미로 과대포장이 잘된 점이 없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톰 포드만의 센슈얼한 무드가 매력적인 브랜드.

 

 

산타마리아 노벨라

A부터 Z까지 '이탈리아'다.
에바를 샀다가
응?
이랬었다. 두 번째 사서 쓰는 동안 또 사진 말아야지 그랬다. 그런데 또 살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되게 매콤하다. 맵고 따끔거리고 건조한데 저 밑에 따뜻함도 있다. 차고 시린 겨울에만 있는 아늑함 같고, 크리스마스 같고, Freddy Cole과 Sarah Vaughan을 듣는 눈 내리는 밤 같고, 까슬한 질감의 램스울 같다.
산타마리아 노벨라에 코롱이 많아서인지 지속력이 하찮은 걸로 유명한데 그중 에바는 나름의 존재감을 갖고 있다. 공간과 어울렸을 때의 에바의 향이 좋아서 욕실에 자주 뿌리곤 한다.

 

크리드

게르만인에게 붙잡혀 배를 타야 할 것 같은 모습, 갖고 싶지 않은 못생긴 모습을 하고 있어서 가까이 다가가 보지도 않았는데 알고 보니 매우 고가의 헤리티지 브랜드였다. 그 사실을 알았을 때, 보틀 디자인이 내 취향과 멀어서 와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내 기준 로고도 너무 못생겼고 보틀도 못생겼다. 향을 경험하면 '오, 정말? 다르구나, 이래서 비쌌구나.' 할지 모르겠는데, 그냥 앞으로도 맡아보지 말아야지 라는 생각만 확고해졌다. 뭐라고? 못생겼는데 비싸기까지 하다고? 얇아서 예민한 피부 때문에 착향이 쉽지 않은 사람에게 이렇게까지 고가의 향수란 불필요하고 무의미하다. 그리고 나는 저렇게 생긴 물체를 내 공간에 절대로 두고 싶지 않다.

 

세르주루텐

개미 같이 생겼다. 또는 영화 크림슨 피크 같다.

 

칼릭스 Calyx

고등학생 때 칼릭스를 엄마가 사 주셨다. 관심이 적은 정도 아니라 아예 없던 때였고, 맘에 들었기도 해서, 다른 향수를 써 볼 생각조차 안 해 봤다. 칼릭스가 그땐 아라미스에 있었고 한동안 보이지 않다가 크리니크에서 다시 나왔다. 그리고 언젠가부터 크리니크에서도 국내 판매를 하지 않는다. 미국 크리니크에서 직구를 해야 하는데 그렇게까지? 엄마가 골라 준 거였고, 그거 하나만 오래 썼고, 그래서 아쉬움이 컸다. 비슷한 제품이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칼릭스를 닮은 향은 아무 데도 없어 보였다. 아무 데도 없다 보니 대체 칼릭스가 무슨 향을 가졌길래 비슷한 게 이렇게 없는 거야 싶으니까 그때서야 향조, 계열, 노트 같은 단어들을 찾아보게 된다. 그러니까 이 향수 저 향수 써 보기 시작한 게 칼릭스를 잃고 나서부터다.

 



1. 향수는 가짜다. 아무리 최고급 원료를 사용했대도 사람이 화학성분을 조합해 만들어내는 온갖 다채로운 향이다. 이 가짜 향이 기관지를 관통해 뇌를 쿡 찌르는 것 같은 감각 때문에 속이 울렁거리고 불편할 때가 많다. 때때로 식당 옆 테이블에서 풍기는 너무 진하고 강한 화장품 향을 견딜 수가 없다. 입으로 음식을 먹는 건지 화장품을 먹는 건지 모르겠다. 그럴 거면 차라리 세탁하면 없어질 옷에 밴 음식 냄새가 낫다.
2. 향은 음악과 비슷하다. 장면을 각인시킨다. 기억을 만들어 준다. 책갈피처럼 꽂혀 있다가 그날 그곳 그 시간 그 사람을 펼쳐 보여준다.
3. 내가 생각하는 향수의 장점은 메이드 인 차이나가 없다는 것이다. 어디 없지 않겠지. 아직까진 못 봤다.
4. 체취와 섞인 향수의 향도 나쁘지 않지만, 안을 때 맡아지는 그냥 살 냄새가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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