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수에 관심이 없지 않으나 또 많은 경험과 지식은 없는 사람이 DIPTYQUE L'OMBRE DANS L'EAU를 샀다. 딥티크에도 플로럴 쪽으로도 딱히 호감 없는 내가 롬브르단로의 향이 궁금해진 것은 지인이 이거 '시원한 장미향'이라고 가르쳐 주어서였다. 플로럴 향수인데 시원하다고?
원료 Rose, Blackcurrant buds, Petitgrain
히든 노트 Blackcurrant Leaves
베이스 노트 Ambergris, Musk
향수에서 꽃시장 냄새가 나다니
매장에서 받은 시향지에서는 놀랍게도 생화 한가득에 가까운 향이 났다.
물 위의 백조가 동화책 아름다운 삽화처럼 그려져 있지만 첫 향을 맡은 순간 내 머릿속에는 이거 무슨 향이더라 생각할 틈 없이 순식간에, 익숙한 고속터미널 3층 꽃 도매시장 전경이 펼쳐졌다.
플로럴에 다양한 계열이 있겠으나 일반적으로 예쁘고 달큼한 향을 떠올릴 수 있는데 생화를 다루어 본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실제 꽃향기라는 것이 생각처럼 농밀하고 sweet하지만은 않다. 따뜻함보다는 서늘하게 줄기를 타고 올라오는 풀 냄새가 짙은 경우가 많고 사람의 후각으로 향이 잘 느껴지지 않는 꽃도 많다. 대중이 좋아하고 기대하는 꽃향기란 내 생각에 꽃잎보다는 열매가 가진 달콤함 또는 설탕의 맛, 케이크의 폭신하거나 크리미한 질감에 가까울 것 같다.
보틀 디자인이 가진 힘
모서리에 단정하게 각이 진 오벌 형태를 갖고 있다. 같은 셰입의 오벌 라벨이 보틀 앞에 붙여져 있는데 이 라벨의 앞뒤 양면으로 목각 판화 같기도 하고 핸드드로잉 같기도 한 일러스트가 있다. 제품마다 다 다른 일러스트에는 향수 이름의 스토리가 담겨 있다. 뒷면의 일러스트는 투명 유리와 액체를 통과해 보이기 때문에 앞면과 다른 무드가 있다. 오벌 라벨 가장자리의 세리프체 타이포그래피는 파리 딥티크의 주소다.
로고 아이덴티티, 향수의 네이밍, 패키징 디자인까지 스토리텔링을 잘 전개한 브랜드란 생각이 들었다. 소비자의 감성에 소구하기 충분해 보였다. 구성 요소들의 밸런스와 한 끗 차이 디테일이란 이렇게 중요하다. 하나하나를 따로 보면 참신하지도 대단치 않을 수도 있는데 이 모든 것들의 조화가 딥티크 브랜드의 철학을 담고 있는 듯 보이고 그냥 어떻게 보아도 프랑스 파리가 가진 서정적이고 낭만적인 이미지다.
그런데 지루함도 있다
분명 딥티크가 가진 개성이고 매력인데, 이렇게 빠짐없이 세밀하게 스토리텔링을 담아내는 방식에서 나는 좀 지루함을 느꼈다. 뭐가 너무 꽉 차 있으니까 금세 시시해진다. 여백이 없는 맥시멀리스트 사람의 집 같다. 내가 상상하고 내가 개입할 여지를 주지 않는다.
diptyqueparis.com
향수 제조가 아니라 패브릭 디자인으로 시작했다는 창립 히스토리를 알고 나서는, 라벨 삽화를 정성스럽게 그려놨네 생각이 들었던 것도 이해가 되었다.
두폭화
어원이 궁금해서 찾아보게 된 diptych, triptych.
좋아하고 소비하는 브랜드가 아니어도 철학과 히스토리를 알고 나면 진정성 있게 다가오는 것이 생긴다.
향수에 작은 관심만 있는 사람의 롬브르단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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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미 안 나는 floral.
남녀 누구든 어떤 옷에도 어떤 계절에도 쓸 수 있을 향.
꽃시장에 가면 나는 향.
꽃시장에서 사 온 생화 손질할 때 나는 향.
적당한 비 내리는 날씨에 젖은 대지와 젖은 나무가 가진 냄새.
장미향을 즐기고 싶은데 화려하거나 예쁜 향은 피하고 싶다면 시도해볼 만하다.
가볍지도 무겁지도 않다.
첫 향과 시간이 지난 후의 향이 크게 다르지는 않았다. 처음의 꽃시장이 사라지면서 서늘함이 점차 따뜻해지는 정도였고 마지막까지 남는 노트도 덥거나 느끼하지는 않았다. 이것도 여러 가지 조건에 따라 다르긴 해서 신기하게도 옅은 머스크가 누군가에게서는 콤콤하게 발향되기도 했다.
ㅡ
딥티크를 처음 사 보았다. 향수 콜렉터도 아니다. 한 개나 두 개로 떨어질 때까지 쓴다. 생생한 꽃시장 이미지가 인상적이어서 플로럴에 관심 없는 사람에게 이번 기회에 장미향을 써 볼까라는 생각이 들게 했다. 내 취향으로는 두 병째 갖고 싶어질 것 같진 않은데, 자체로 충분히 매력적인 향.
향이다. 향인데. 1/3 지점쯤 사용했을 때 시큼한 악취 같은 찌린내(그 와중에 은은하다.)를 느끼고 깜짝 놀란 이후로 못 쓰고 있다. 당연히 향수를 찌린내로 만들었을 리 없다. 나의 감각이 어느 순간 그렇다고 인식했을 뿐. 분사하자마자 나는 첫 향은 아니다. 체취와 섞인 향도 아니다, 유리에 뿌려 보아도 마찬가진 걸 보면. EDT로 테스트하고 EDP를 산 걸까라는 의심이 좀 있다. 또 충분한 시간을 가지고 시향과 착향 후 구입했대도 집으로 가져와 사용했을 때 아주 똑같지도 않다. 그래서 욕실 한 칸에 라벨 뒷면이 보이도록 세워 두었다. 매트한 앞면 질감보다 반짝임이 있는 뒷면을 즐기고 싶어서. 그래, 이건 메이드 인 프랑스 유리 공예야, 크리스털로 만든 액자야, 나는 백조 오브제를 산 거야. 관상용으로 나쁘지 않다. 본질적인 목적을 잃었어도 나름의 역할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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