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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TE

옷이 날개라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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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장 앞을 지나가다가 매니저와 마주쳤다. 매니저는 반갑게 인사하며 자연스럽게 나를 매장 안으로 안내했다. 들켜서 잡혀 들어가는 기분이었다. 자주 가는 카페에서 아는 척을 해 주는 상황과는 달라서 불편한 마음이 한 구석 있었다. 커피는 자주 사도 옷을 커피 마시듯 사지는 않아서 그렇다.

 

- 아니! 작년에 원피스 사시고 나서 왜 한 번을 안 오세요~ 호호호 하하하

 

여기서 모직 원피스를 샀다. 구입한 때가 10월쯤이었는데 그해 겨울에서 다음 해 봄까지 그 옷을 교복처럼 잘 입었고 그 이후로도 계절이 또 한 번 바뀌었을 때였다. 그동안 재방문을 한 번을 안 했으니 매장 매니저가 저렇게 말했을 법도 했다. 내 마음속의 말은 이랬다.
"제가 옷을 그렇게 자주 사는 사람이 아니에요."
옷이 직업인 사람도 아니고, 옷을 너무 좋아하는 사람도 아니고, 모델처럼 수많은 스타일을 쿨하게 소화할 수 있는 사람도 아닌데 옷을 어떻게 자꾸 사나요.

 

 

비싼 옷과 가방을 사고
비싼 미용실에도 가던 시기가 있었다

30대 초까지였던 것 같다. 그리고 특정 계기가 있지는 않았는데 어느 순간 그 모든 게 재미가 없어지는 타이밍이 왔다. 그 모든 것이 내 인생에서 아무것도 아니지 않았지만, 지나고 보았을 때 큰 의미가 되어 있지도 않았다.
질 좋은 것을 그만한 가격으로 사면 정말 오래오래 입고 쓸 수 있다. 또 내 눈에 좋아 보이고 멋져 보이는 것들이 그때나 지금이나 여전히 존재한다. 다만 지금은 많은 것을 사지도 않고 마음에 담지도 않게 되었다. 당장 지갑을 열 것 같은 유혹의 순간에도, 내가 이걸 가져서 뭐하나 싶은 생각이 더 앞서는 거다. 유혹의 순간과 고민의 시간이 아슬아슬할 때가 아직도 많다.

 

배리 BARRIE

얼마 전 배리에서 니트웨어를 입어본 일이 있었다. 나는 배리가 샤넬 그룹의 브랜드라는 사실도 모른 채 매장에 들어갔다. 사실 배리 매장에 들어간 이유도 내가 아니라 친구 때문이었다. 친구가 봐 둔 스웻셔츠가 있어서 들어갔는데 정작 본인은 시착하지 않았고, 내게 시착을 권하고 있었고, 어어어어 하다 보니까 거울 앞에서 내가 재킷을 입어 보고 있었다. 예쁜 옷이었다.

 

not a 미니멀리스트

백화점에 자주 가도 돈과 시간을 할애하는 카테고리는 지하 식품관이고, 다른 층을 올라가면 돈이 있어도 살 게 없네라는 말을 하며 다닌다. 저 말의 반은 진실이고 반은 농담이다. 가격이 비싼가 적정한가 싼가를 고민하려면 일단 맘에 쏙 꽂히는 것이 있고 봐야 하는데, 그 정도로 눈에 들어오고 맘에 들어오는 무엇이 생각보다 그렇게 흔하게 있지 않다. 수만 가지 브랜드와 수만 가지 제품이 진열되어 있는데도. 그래서 맘에 드는 것들이 오만 가지 육만 가지라서 집 안이 어지러워질 정도로 사들이고 그러다 보니 집이 좁아져서 넓은 집으로 이사 가는 사람들의 마음이 신기하다. 맘에 드는 물건이 어떻게 그렇게 많을 수가 있는지가 놀랍다. 비꼬는 게 아니라 순수하게 놀랍다는 의미다. 이건 색이 아쉬워, 이건 소매가 아쉬워, 이건 넥칼라가 아쉽고, 이건 지퍼가, 이건 단추가, 이건 원단이, 이건 사이즈가, 하면서 내가 미련 없이 구입을 포기하게 되는 것들의 개수가 저 사람들이 사들이는 개수만큼 되는 것 같다.

 

옷과 날개

옷이 날개라는 말도 사람과 상황에 따라 때로 맞고 때로 틀릴 수 있다. 아마 본질은 날개 자체가 아니라서 그럴 거다.
최소한의 격식이 필요하거나 나를 포장해야 할 필요가 있는 장소와 때가 있다. 그런 장소와 때가 아니더라도 좋은 태가 나는 옷을 입고 향수를 뿌리고 깨끗한 신발을 신고 미용실에서 온 것 같은 머리를 하고 있으면 아무래도 괜찮은 대우를 받을 수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그게 나 자체가 괜찮은 사람이라는 뜻은 아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좋은 것으로 휘감은 채 좋은 차에서 내려도 길에 침을 뱉고 담뱃갑 비닐을 바닥에 훌훌 버리는 사람은 그냥 겉만 요란한 쓰레기가 된다. 본인이 훌훌 버리는 비닐 껍데기보다 하찮아진다. 그런 사람에게 날개가 무슨 소용이 있을 리가 없다. 물론 날개로 속이려는 바보들과 거기에 속는 바보들이 많은 게 또 현실이긴 한데.
상대적으로 평범하고 허름한 차림으로 보여도 당당한 태도와 겸손한 말투에서 숨길 수 없는 것들이 있다. 고객을 응대하는 직업을 가진 사람들 중에도 그 사실을 아는 사람과 모르는 사람이 있는 것 같다.

 

 

1. 엄마가 입다가 작아졌다고 버리는 코트를 주워 입었다.

예쁜 옷은 아니지만 질 좋은 옷이다. 앙고라 100으로 정말 따뜻하고 보드랍다. 도톰하고 안감이 있는데도 가볍다. 보기 좋게만 만든 얇은 코트가 아니다. 모양새가 맘에 다 들지 않고 어깨와 품이 아주 잘 맞지도 않는다. 아주 잘 맞지 않는 옷을 내 옷으로 굳이 구입하지는 않았을 테지만, 버리기엔 아까운 옷이었다. 그래서 조금의 부족함이 있어도 그런대로 자주 입고 있다. 내가 자주 입은 지도 몇 년 되었기 때문에 낡은 태가 이제 좀 나지만 아직도 내가 가진 코트 중 가장 따뜻하다.

 

빈티지-코트
엄마 옷이었는데 내 옷이 된 또 다른 코트. 압축 울 같다. 20년쯤 되었을 것 같다.
빈티지-코트-케어라벨
소재와 제조 연도를 알고 싶었는데 아무것도 읽을 수 없는 케어라벨

 

2. 동생이 입다가 작아졌다고 버린 다운점퍼도 주웠다.

실밥 정리가 필요했지만 밝은 색인데도 때 묻거나 해진 곳 없이 깨끗했다. 입어 보니 남성용이라서 어깨가 약간은 커 보여도, 부피가 있는 한겨울용 다운이 조금 부하다고 되게 이상할 것도 없었다. 나는 경량 다운만 가지고 있고 겨울 점퍼가 없기 때문에 일단 당장 올해 한 철이라도 입어보자 이러고 주웠다. 집 앞에 우유 사러 나갈 때라도 입을 수 있겠지.

 

 

3. 최근 무인양품에서 스웨터를 샀다.

고급 울, 고급 원사, 고급 봉제 퀄리티일 수 없고 패턴도 고급 옷을 입었을 때와 같을 수 없다. 필링이 빨리 일어날 수도 있다. 분명 날개의 역할을 해 주는 옷은 아니다. 그런데 적당하다.(무인양품에서 적당한 것 찾기 쉽지 않은 이유, 보통 키에도 기장과 소매가 온통 짧다.) 날개가 필요하면 원단으로 유명한 브랜드에서 메이드인이탈리아를 사면 된다.
옷이든, 차든, 집이든, 시계든, 욕심이 많이 없어진 요즘은 웬만해선 살 필요가 없거나, 또는 웬만한 것이 좋은 거란 생각을 자주 한다. 이 '웬만한'과 '적당한'의 기준이 사람마다 그리고 때와 장소에 따라 다를 것이긴 하지만. 그리고 나는 날개의 힘으로 돋보이는 사람보다는, 4만 원으로 산 스웨터를 날개처럼 만들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4. 차라리 하늘을 날 수 있는 진짜 날개를 신이 준다고 한다면, "네! 주세요! 감사합니다!"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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