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초 구입한
조 말론 다크 앰버 앤 진저 릴리
Jo Malone Dark Amber & Ginger Lily
조말론의 이름들은 직관적이어서 좋다.
첫 번째 날. 울렁울렁했다. 집에 돌아오자마자 시향지를 버렸다.
두 번째 날. 착향을 해 보았다. 첫날과 좀 달랐다.
세 번째 날. 팔 안 쪽에 다크 앰버 앤 진저 릴리를 묻히고 백화점을 한 바퀴 돌았다. 팔에 코를 갖다 댈 때마다 첫날의 울렁거림은 없었다. 차분한 결을 가진 부드러운 향으로 느껴졌다. 100%의 확신은 없었다. 내가 지금 이걸 좋다고 느끼는지 아닌지 알쏭달쏭함이 있었다.
여자 화장품 냄새(를 싫어한다) 같은 무엇이 아예 없지는 않은데
어, 매력 있다, 나쁘지 않다, 첫인상 때는 왜 그렇게까지 불편했지?라고 느꼈다.
낮은 채도로 짙게 깔린 무드가 있었다. 그런데 그게 또 과하지 않았다.
이 향으로 온몸을 휘감기보다는 베티버 앤 골든 바닐라가 가진 매트한 바닐라에 한 방울 떨어뜨리고 싶은 느낌이었다. 또 레이어링 목적보다도, 내 의지와 무관하게 두 향이 옷장과 방에서 섞였을 때 이상하지는 않았으면 했다.
그래서 세 번째에 50ml를 구입.
했는데 세 번 테스트하고 신중하게 선택했는데도, 좀 느끼한데? 생각보다 더 무겁고 우아한데? 나는 이렇게 우아한 사람이 아닌데? 어떡하지? 좀 뻘쭘하고 민망해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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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아, 관능, 고혹, 네? 뭐라고요? 퇴폐?
다크 앰버 앤 진저 릴리를 검색해 보면 우아미, 관능미, 퇴폐미, 같은 단어들이 나열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구입할 때까지도 이런 정보를 전혀 몰랐다. 어디 한 구석 하나도 안 그런 사람이 "나는 우아해질 거야!" 하면서 뿌리게 생겼다. 나 이거 다 쓸 수 있을까?
그리고 집에 가져와 사용해 보았을 때 알았다. 이거 애초에 한 방울 똑 떨어뜨릴 수 있는 향이 아니었다. 한두 번 스프레이만으로 베티버 앤 골든 바닐라를 압도했다.
사실 더 다크하고 더 파우더리하고 더 강력한 향수들과 비교하면 이 정도는 데일리하게 쓸 수 있다고 할 만 한데 내게는 이만큼도 충분히 무거웠다. 나의 차고 얇은 피부에서 심지어 지속력도 좋았다.
긴가민가 생각 끝에 당근마켓에 올렸다. 상자에 넣어 리본으로 묶어 두었다. 긴가민가의 미련이 있다 보니 미치게 저렴한 가격으로 올리지 않았던 건 맞는데, 그렇다고 '뜯었으면 일단 중고'를 감안하지 않은 무리수도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구입시기가 고작 며칠 전이라서 사용기한이 한참 남아 있으며, 잔량 99% 기준으로 나름 적정한 가격이었다. 살 생각 있는 사람이라면 채팅으로 에누리가 되는지 물을 거였고 그때 깎아주면 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ㅎㅎ 관심상품으로 찜한 불특정 7명 중 아무도 내게 말을 걸지 않는 거였다. 이틀 동안 아무도.
며칠 뒤 다시 꺼냈다. 스스로 세뇌의 말을 주입했다.
'이건 너무 좋은 향이다', '나는 느끼하지 않다', '나는 우아하...다',
그러니까 관능미퇴폐미는 어떻게 해도 안 될 것 같은데 우아한 척은 될 수 있잖아? 블랙의 포멀한 룩으로 옷 입지 않아도 누군가는 반전의 매력으로 봐줄지도 모르잖아.
그리고 나의 솔직한 의견으로는 이 향이 사실 뭐 그렇게 관능과 퇴폐까지는 아닌 것 같았다.
사람이 퇴폐미가 있으려면 delicate한 슈가 캔디 같은 향을 뿌리고도, 원마일 웨어를 입고도, 목소리만으로도, 아니지 그냥 찰나의 눈빛만으로 치명적 퇴폐미를 뚝뚝 흘릴 수 있을 거였다. (여기서 생각나는 배우. 데인 드한. 에바 그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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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응의 단계 I
스스로 자기 주입의 효과인지, 향세포가 진화하는 중이어선지, 어쨌든 몇 가지 방법을 시도한 며칠 노력의 결과로-
느끼함의 결이 좀 달라졌다. 느끼함 중 2 정도가 여전히 남아있다면 8 정도는 뭉근하게 다가왔다. 샴페인의 달콤이 아니라 와인, 꼬냑 같은 달큰함이었다.
부담이었던 묵직함은 한결 부드러워졌다. 극세사 담요의 말랑한 보드라움 아니라 벨벳 또는 가죽의 질감이 가진 부드러움이었다.
다크 앰버 앤 진저 릴리에서 내가 느낀 느끼함은 옷감에 뿌렸을 때 더 쌩하고 센 듯했다. 피부에 뿌렸을 때는 한결 나았다.
또 남의 코에는 모르겠으나 내 코에 좋게 다가오는 잔향은, 집에 돌아온 저녁에서야 느껴졌다.
내 몸에서 이거 혹시 톱-미들-베이스까지 너무 천천히 움직이는 걸까. 적당한 속도를 내주면 좋은데 그렇지 못하니까 잔향에 도달했을 때의 내 피부는 충분한 양을 품고 있지 못한 상태인 걸까. 그러니까 이거 좀 이과의 물리화학 같다.
향수는 얼마쯤 물리화학의 분야로 볼 수 있음. 그런데 난 물리화학 너무 어려웠다.
지층, 단층, 행성, 우주를 다루는 자연과학 쪽은 어려워도 흥미로운데
그나마 화학은 원소들 간 반응을 외우는 정도로 어떻게든 됐는데
물리는 속도시간무게부피질량거리 등등등등 그 모든 숫자를 다 합쳐서 계산하라고 했다. 머릿속이 깨끗하게 새하얘졌다. 그만큼 내게는 이해불능으로 어려운 영역이었다.
향수에서 물리화학으로 갔다가 이번에도 먼 길로 새는 이야기
'확신의 문과'는 언어가 어려운 적이 없었다. 문제 푸는 것도 재밌었다. 국어영어가 아니었다면 아마 대학 진학 못 했을 거란 생각도 했다. 왜냐면 수능 성적표를 받았을 때 국어영어만으로 상위 0.몇%였으니까. 수학과학 점수는 생각조차 안 난다. 학교를 가긴 간 걸 보면 저 밑바닥을 쳤던 건 아니었나 본데 아무튼 형편없었다.
(이유를 모르겠는데 수학 중 유일하게 삼각함수만 재밌었다.)
숫자 앞에서 고장이 난다. 때때로 나 스스로도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 지인의 옷가게를 며칠 본 적 있는데 그때 지인이 그랬다. 너 왜 계산기로 하는데도 틀리냐고.
그래서 건축 수업이 그렇게 힘들었다. 세모난 스케일자를 나는 도대체 읽을 수가 없는 거였다. 이 스케일자가 내 눈엔 흡사 외계인... 아니 외계인과 말을 놓는 게 차라리 빠를 것 같았다. 내 머리가 축소+대입+환산을 못하는 거다.
도면 과제를 착한 동기 꺼 보고 그림 그리듯 따라 그려서 제출하곤 했다. 이때 교수가 출결과 과제가 엉망인 학생(=나)을 많이 달래고 봐 주시는 분이었다. 베끼고 그려서라도 내라고 하셨고 제출로 인정해 주셨으니까. 물론 학점이 좋았을 리 없지만 그분 덕분에 어떻게든 강의를 이수할 수는 있었지.
그 교수님 감사합니다, 성함도 잊어버렸지만요. 제도실 옆 자리 동기도 너무 착한 친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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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응의 단계 I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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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가지 시도 중 주효한 것은 하체에 분사하는 방법이었다. 스타킹을 신기 전 무릎과 발목 사이 어딘가의 지점에 뿌리면 은은하게 올라왔다. 그렇게만 뿌려 놓아도 차에 타고 내리면서 폴싹거릴 때, 바람이 슬쩍 불어올 때, 향이 움직이는 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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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한 가지는 베티버 앤 골든 바닐라와 다크 앰버 앤 진저 릴리를 함께 사용하는 것이었다. 효과적인 방법을 전혀 알고 있지 못하므로 레이어링이라기엔 애매한데, 두 향이 섞였을 때 어느 한쪽이 튀거나 이질적이지는 않았다.
베티버 앤 골든 바닐라가 가진 다소 건조하고 매트한 질감을 다크 앰버 앤 진저 릴리가 좀 부드럽게 눌러 주는 듯했고,
다크 앰버 앤 진저 릴리의 달콤함의 무게를 베티버 앤 골든 바닐라가 한결 덜어내 주는 것 같았다.
향 전문가 중 누군가는 안 하느니 못한 마이너스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나 ㅎㅎ 이게 뭐 이과의 숫자처럼 정답이 있는 거겠음?😁 그냥 나만의 주관적인 '느낌'인 거라서, 가끔 빈 시향지에 저 두 개를 양면에 뿌린 후 머플러 사이에 툭 던져두기도 하고, 또는 코트 포켓에 쏙 넣어 다니다가 꺼내 맡기도 한다.
그러다 보면 미들이 지난 지점쯤에서 이 쪽의 베이스와 저 쪽의 베이스가 합쳐져 더 달아지는 잔향으로... 남았기 때문에 ㅎㅎ 몸에 뿌릴 때 일부러 섞지는 말아야지 했다. 단독 사용했을 때 매력 있다에 한 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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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차 알 수 있겠지
프래그런티카가 알려주는 이 녀석의 어코드와 노트들은 대충 이러하다.
저 중 어디에서 무엇을 내가 느끼하다 하는지 지금으로선 알 수 없다.
카다멈, 페퍼, 자스민, 패출리에서 오는 건 아닌 것 같다.
진저도 아마 아니겠지. 사실 먹는 진저만 알뿐 향료로 쓰이는 케미컬 진저가 뭐 어떤 힘을 내는지 향세포는 알 턱이 없다.
또 한때 꽃에 발가락 담근 적 있었지만 저 플로랄 노트 중 워터릴리는 한 번도 만져본 적 경험한 적이 없다.
그래서 샌달우드와 블랙앰버와 키아라 인센스와 레더를 의심하고 있다. 아니, 샌달우드는 빼도 될 것 같다. 샌달우드가 좀 달고 따뜻해도 느끼한 결의 주범은 아닌 것 같다. 샌달우드가 머스크나 베티버와 함께 있을 때라든지 보라색 아닌 플로럴 노트들과 함께 있을 때는 느끼울렁거린다고 못 느꼈다.
저 중 A 때문일 수도 있고, A 하나가 아니라 A와 B의 배합이 내는 힘 때문일 수도 있다.
나는 화장품 분내를 좀 견디기 힘들어하는데 다크 앰버 앤 진저 릴리는 파우더리가 강력하게 지배하고 있지는 않다.
그리고 내가 힘들어하는 파우더리 향조에는 아마도 바이올렛, 아이리스, 알데하이드가 크게 관여하는 듯.
모든 것이 향세포적 경험에 의한 추측에 가깝다.
그냥 나는 향수를 재밌어하는 것 같다. 구입하고 싶은 욕구가 막 그렇게 크지는 않고, 뭐랄까 약간 인문학이나 문화? 역사? 연구? 쪽 흥미로운 체험의 대상으로 향수를 보고 즐기는 것 같다. 내 것으로 만들어서 직접 가지고 놀면 체험의 깊이가 다를 거지만, 또 그렇게까지 파고들고 싶지는 않은가 봄. 향수 가격이 사실 한두 푼 하지 않으니까 내게 수집 기질과 덕질 기질이 없다는 것이 다행이라는 생각도 있다.
향수에 관심 있는 자라면 모를 리 없는 '프래그런티카 fragrantica.com'는 자체적이고 객관적인 정보만을 적시하고 있지는 않다.
"사실 기반 내용 + 이용자들의 의견 수렴"으로 정보 제공이 되고 있는 곳으로 보인다.
그렇기에 100% 신뢰할 수는 없으나 브랜드별, 조향사별, 노트별로 많은 정보에 다양하게 접근할 수 있고 외국인들의 리뷰를 참고할 수 있는 유용하고 재밌는 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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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적응 중이다. 그리고 당근 마켓에 올렸을 때의
의심과 불신과 후회는 일단 사라지고 없다
내 것이 되려고 안 팔렸나 봄 + 채팅하고 약속 잡고 거래하러 나가는 일이 사실 안 파는 것보단 번거롭긴 함 = 한 긍정적 하는 사람의 결론.
당근에 올렸다 다시 거둔 게, 이 향에 어느 정도 적응이 된 게, 나만의 의지가 아니라 얘도 내게 손 내밀어 줬던 거 같다는 느낌.
이라고 하면 ㅋㅋ 오글거리는 미친 소리로 들리겠지만 ㅎㅎ 정말 그랬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에 얘가 착하고 다정해 보였다. 헿. 나의 다크 앰버 앤 진저 릴리는 착하고 다정하고 사려 깊다.
한낮이 뜨거운 계절에는 덥고 무거울 것 같기도 하고,
모기와 벌레를 피하는 것이 더 중요해서 어차피 여름에는 향수를 쓰지 못할 거지만, (왜냐면 물렸다 하면 피부가 돌땡이처럼 붓는 사람)
내 생각으로는 와, 오늘은 덥네, 하기 전 쾌적하고 일교차 큰 봄날까지는 쓸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야외 활동 아니라 에어컨 냉방이 추운 실내에서는 또 상관없을 것 같다.
공기가 서늘해지는 계절이 돌아왔을 때 내가 다크 앰버 앤 진저 릴리를 계속 품고 있을지 아직 확신의 단계는 아니다. 1월 구입했고 지금은 2월이고 얘의 매력을 알아가는 중이고 앞으로도 더 친해질 수 있을 것 같은 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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